맨위로가기

김용범 (공산주의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용범은 1902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공산주의 운동가이다. 1925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했으며, 1927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참여했다. 1930년 소련으로 건너가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복역했다. 광복 후 조선공산당 평안남도 조직부장,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를 거쳐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7년 위암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그의 이름을 딴 김용범 혁명유자녀학원이 설립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국내파 - 박정애
    박정애는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 북한 건국에 기여한 공산주의 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조선민주여성동맹 초대 위원장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북한 정권 수립에 핵심 역할을 했으나 숙청과 복귀를 겪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당료 - 조선로동당
    조선로동당은 1945년 평양에서 창당되어 김일성이 북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위원장으로 추대된 후 여러 정당과의 통합을 거쳐 현재의 명칭을 갖게 되었으며, 주체사상을 유일 지도 이념으로 하여 북한 사회의 모든 분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당료 - 김정일
    김정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대 최고지도자로, 김일성 사망 후 권력을 승계하여 조선로동당 총비서 및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통치하며 3대 세습, 핵무기 개발, 남북 정상회담 등의 사건과 경제난, 인권 탄압 등의 문제를 겪은 인물이다.
  •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가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가 - 이현상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활동한 이현상은 6·10 만세운동 참여, 노동 및 항일 운동, 남로당 활동, 남부군 사령관으로서의 게릴라전 지휘 등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북한에서 애국렬사로 추앙받고 있다.
김용범 (공산주의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용범, 북한 우표에 등장
이름김용범
원어 이름김용범(金鎔範)
로마자 표기Gim Yong-beom
직위
직위조선로동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장
조선공산당 총비서
임기 시작1945년 10월 13일 (조선공산당 총비서)
임기 종료1946년 12월 18일 (조선공산당 총비서)
임기 시작1946년 8월 31일 (조선로동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장)
임기 종료1947년 9월 7일 (조선로동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장)
전임"사무실 설립" (조선공산당 총비서)
후임김두봉 (조선공산당 총비서)
후임장순명 (조선로동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장)
개인 정보
출생1902년 8월 18일
출생지조선 평안남도 성천
사망1947년 9월 7일
국적북한
배우자박정애
정치 경력
소속 정당조선로동당
조선공산당 (1925년~1946년)

2. 생애

1902년 평안남도 안주시에서 태어났다.[2]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농업에 종사하다가, 1921년 평양 대성학원에 편입하여 1922년 졸업했다.[2]

1923년 만주로 건너가 1925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며 본격적인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다.[2] 고려공산청년회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등에서 활동했으며, 1930년에는 소련으로 건너가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2]

1932년 귀국 후에는 노동자로 일하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등 지하 활동에 힘썼으나, 1935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2] 1938년 출소 후에도 평양, 경성 등지에서 활동을 이어가다 1943년 다시 만주로 갔으나 또다시 체포되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2]

1945년 해방 후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평안남도 조직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10월 한반도 북부의 공산당 조직인 북부조선분국이 설치되자 책임비서로 선출되어 북한 초기 정치 활동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2] 1946년 북조선 로동당이 결성되자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2]

1947년 9월 7일 병으로 사망하여[2]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3]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51년 김용범 혁명유자녀학원을 설립했다.[2]

2. 1. 젊은 시절

1902년 8월 18일 평안남도 안주군 연호면 용삼리(현 안주시)에서 태어났다.[2] 어린 시절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21년에는 한학 실력을 인정받아 평양의 대성학교 보통과 4학년으로 편입하였고, 같은 해 3월 고향인 안주군에서 이윤수(李允洙) 등과 함께 안주군 농지개량친목회를 창립하는 활동을 하였다. 1922년 3월 대성학교 보통과를 졸업하였다.[2]

1923년 만주로 건너가 막노동과 농장 잡역부 등으로 일하며 생활하다가,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2] 이후 중국공산당 청년부에서 활동하며 조선공산청년회 만주지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설립된 조선공산당의 외곽 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에도 참가하였다.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설립에도 참여하였다.[2]

1929년 용정의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공장 노동자로도 활동했으나, 이듬해 중퇴하였다. 1930년 7월에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중 노동단체인 블라디보스토크 노동자구락부(노동자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2] 같은 해 11월, 코민테른 극동국의 추천을 받아 소련의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에 입학하여 1932년 졸업하였다.[2]

1932년 귀국 후에는 노동자 신분으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등 지하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35년 독립운동가 주녕하와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2] 1938년 출소한 뒤에는 평양과 경성 등지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하였다. 1943년 다시 만주로 건너갔으나 또다시 체포되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2]

2. 2. 모스크바 유학과 공산주의 활동

1930년 소련으로 건너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동자 클럽에서 활동하다가[2] 같은 해 11월 코민테른 극동국의 추천을 받아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과에 입학하였다.[2] 1932년 5월 대학을 졸업하고[2] 같은 해 11월에는 태평양노동조합 서기국의 지시로 박정애와 함께 귀국하여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목공이나 전기공으로 일하며 신분을 위장하고,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과 무력 투쟁 중심의 비합법 노동조합인 적색노동조합 조직 등 지하 활동을 전개했다.[2]

1935년 3월에는 주영하와 함께 평양 지역의 좌익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하다가, 같은 해 9월 전국적인 사회주의 노동조합을 만들려던 시도 중에 주영하 등 동지들과 함께 평양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2]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2]

1938년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평양, 경성, 양주, 흥남 등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목공, 철공, 전기공 등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야학을 운영하고 지하에서 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조합 조직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검문을 피해 1941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잠시 국내로 들어왔으나 다시 검거를 피해 1943년 만주로 피신했다.[2] 만주에서도 노동조합 조직 활동을 벌이다가 1945년, 밀정의 고발로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평양형무소로 옮겨졌다.[2] 그는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2. 3.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수립 운동

1945년 8월 16일 석방된 뒤 소련군 정치부에 연락하기 시작했고, 바로 평양시내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평안남도당 조직부장과 조선공산당 평남도당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그해 9월 소련군의 38도선 이북 주둔 준비활동을 하였다. 9월 3일 현준혁이 평양에서 암살되자 혼란을 수습하고 소련군 주둔 준비활동을 계속하였다.

한편 소련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놓고, 박헌영 등은 당의 본부가 서울에 있다는 이유로 북조선분국 설치를 반대하자 김일성과 함께 북조선분국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박헌영으로부터 서울에 있는 조선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조건하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치를 승인받았다.

1945년 10월 10일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노력자대회를 소집하였다. 중앙위원회 대표 57명과 도당, 군지구당대표 180명을 소집한 그는 회의에서 즉시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자이자 제1비서로 선임되었다. 그가 추대된 배경으로는 현준혁의 암살로 혼란해진 북조선에 공산당 건설 목적 및, 태평양 전쟁 당시 소련의 밀명을 받고 여러번 평양에 파견된 인물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제2비서에 오기섭과 무정을 선출했으며, 집행자의 한 사람으로 김일성을 선임하였다. 10월 14일 소련군이 평양에 주둔하자 소련 주둔군 환영대회의 사회자로서, 소련 주둔군 사령관 스티코프를 대신해 평양에 파견된 레베데프 소장을 소개하였다.

2. 4. 북조선로동당 독립 및 최후

김용범은 조선로동당 북조선분국의 독립을 추진하여, 1946년 6월 22일 분국 제7차 회의를 통해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변경하고 소련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창당하였다. 그는 북조선공산당의 제1비서 겸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2]

1946년 8월, 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이 북조선로동당으로 합당하자 중앙위원회 검사위원장이 되었다.[2] 같은 해 9월에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겸 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을 맡았으며, 평안남도인민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2]

그러나 1947년부터 위암에 걸려 병석에 누웠으며, 1947년 9월 7일 결국 위암으로 사망하였다.[2] 그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거행되었고, 장의위원장은 주영하가 맡았다. 시신은 모란봉묘지에 안장되었다.[2] 이후 애국렬사릉에 매장되었다.[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인 1951년에는 그의 공적을 기려 이름을 딴 김용범 혁명유자녀학원이 설립되었다.[2]

3. 사후

1947년 9월 7일 병으로 사망했으며[2],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51년,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평양에 김용범 혁명유자녀학원이 설립되었다.[2]

참조

[1] 서적 From Stalin to Kim Il Song: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C. Hurst & Co. Publishers
[2] 백과사전 김용범(金鎔範) http://encykorea.aks[...]
[3] 웹사이트 김용범(金勇范) http://www.cybernk.n[...]
[4] 웹인용 김용범 http://members.brita[...] 브리태니커백과사전 2012-04-19
[5] 웹인용 북한 정권의 수립과정 http://compedu.cue.a[...] 진주교육대학교 도덕교육과 2012-04-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